티스토리 뷰

Books

The Black book 검은 감정 '설레다'

루돌푸다요 2024. 7. 21. 21:44

2024.07.03 - [책 추천] - The Black book 검은 감정 '설레다'

 

The Black book 검은 감정 '설레다'

2024.07.02 - [책 추천] - The Black book 검은 감정 설레다 The Black book 검은 감정 설레다외면하고 덮어두고 싶었던 부정적인 감정들. 우리는 이것을 '검은 감정' 이라고 부릅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rudolpia.tistory.com

 

 

의심 

의심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듯, 스스로를 믿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상에서의 작은 성공들이 있어야 하고요.'일상에서 나를 기분 좋게 할 성취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 '성취의 빈도를 높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등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작은 성공은 나를 내 편으로 만들어줍니다. 나라는 아군이 생기는 거죠. 아주 사소한 성공들이 나에 대한 믿음이 될거예요. '신뢰' 는 행동을 통해 '목격'될 때 탄생합니다. 믿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은 무엇도 보여주지 않아요. 그러므로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느낌을 줄 작은 성공들을 지속적으로 찾을 수 있길 바라봅니다. 

 

초조함

'해내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초조함과 '잘 해내야 해!' 라는 조급함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초조함은 가능성을 의심하며 생기는 불안입니다. 일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 만들어내는 불안이죠 조급함은 참을성없이 급하게 일을 진행하려는 마음입니다. 무리하게 이루고 싶은 욕심이 발동할 때 생겨요. 불안이 크다면초조함이, 욕심이 크다면 조급함이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조함을 이야기하면서 조급함을 함께 언급하는 건 대부분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에요. 

 

호기심, 자기 신뢰 ,탄탄한 회복력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면 실수도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섭섭한 감정이 생겨도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죠. 하지만 불안, 공포, 자기혐오, 수치심, 등등 부정감정들만으로 삶의 동력을 삼는다면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수를 에너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수를 금기시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해내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초조한 마음을 달리 표현하면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가 될 거예요. 마감일보다 앞서 일을 끝내고, 맡을 일보다 좀더 많은 분량의 일을처리하고, 뒤처질까 두려워 여러 기능을 습득하는 등 분주히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보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내 초조, 조급, 불안이라는 고리를 뱅글뱅글 돌지도 몰라요. 

 

살다보면 유독 힘들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업무일 수도 있겠죠. "힘들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그건 내가 일련의 일에 대응할 힘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반증하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그 상황을 이겨내며 나의 문제해결력을 키울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괴로운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의미예요 그러므로 초조한 마음 때문에 삶이 괴롭다면, 힘들 때와는 다른 자세로 자신을 바라봐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아, 힘들다"라고 할 때와 "아, 괴롭다" 라고 할 때의 차이를 알고 있어요. 우리가 그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을 뿐

 

일에 대한 결과에만 시선을 두면 마음은 온통 미래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지금을 살고 있어요. 

이 시간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확실히 누릴 수 있는 오늘을 초조해하며 흘려보내고, 그렇게 보낸 시간을 다시 돌아보며 조급함을 반복하는 게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미래와 지금의 경계가 뭉개지면 초조함이 생깁니다. 나의 위치와 그에 맞춰 해야 하는 일도 불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아닌,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뚜렷하게 직시하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기. 이렇게 우리 마음이 있어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초조함과 조급함을 다스리는 방법의 시작일 것 입니다. 

 

측은함

측은함은 대상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해요.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실망과 아픔을 겪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이 있다면 스스로를 안타깝고 애처롭게 여기게 되죠. 자신이 측은해지면 상대에게 몹시 서운한 기분이 들고, 서운함이 깊어지면 내가 이 관계의 피해자라고 오인하기도 하는데요. 그땐 분노가 더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대상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확률이 커져요. 물리적인 영역과 정서적인 영역 모두에서 말입니다. 이 과정은 불현듯 일어나고, 이렇게 발생한 감정은 사라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측은함을 느끼면 그 감정에 취하지 말고 자신을 흔들어 깨울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돌려받지못했다고 확신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죠. 다음 예시를 보면, 동일한 상황에 처한 두 그룹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볼까요 ? 

A그룹

  •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 내가 너 때문에 어떻게 살았는데. 
  • 내가 널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 했는데. 

 

B그룹 

  • 나는 너랑 있는 게 좋아서 잘해준 거야. 
  • 나는 네가 좋아서 참을 수 있었어. 
  • 나는 네가 좋아서 싫어하는 일도 할 수 있었지. 

 

분명 동일한 상황인데도 두 그룹의 반응이 상당히 다릅니다. A그룹은 설움이 그득한 것 같은데, B그룹은 

담담한 느낌입니다. 참고로 A그룹은 모든 대사 끝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라는 말을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고 나면 그의 반응을 살피게 됩니다. 두 그룹 모두 그런 것 같은데, A그룹은 마음의 가치를 상대를 통해 결정하고 있어요. 상대가 흡족한 반응을 해주지 않으니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여기고, 나아가 '나를 무시했다' 라고 왜곡해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B그룹은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룹과 다른 말을 했을까요? 두 그룹의 대사를 다시 한번 잘 읽어보세요.  그룹은 상황의 주체가 누구인가요? 내가 무엇을 한 건 모두 '상대' 때문, 혹은 상대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에 비해 B 그룹은 어떤가요? 모든 상황을 '자신'이 선택합니다. B그룹은 자기마음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했어요. 대상에게 마음은 건넸지만, 그의 반응을 기준으로 자기 마음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은 거죠. 한마디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사랑하고 친절을 베풀며 배려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그럼에도 타인에 대해 탐구하는 대신 상대의 생각도 나와 같을 거라고 지레짐작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방식으로 마음을 전하고, 그 이상을 돌려받기 바라며, 결국 내 마음에 들지 않아 실망하고 힘들어하죠. 우리 대부분이 상처받지 않아도 될 일로부터 그렇게 상처를 받습니다.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기대하는 마음은 폭력이 될 수 있어요. "내가 이렇게나 널 사랑하는데, 어떻게 너는 그럴 수 있지?" 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 말의 좀더 분명한 의미는 '너는 내게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겠죠.간절하게 정성을 들이면 언제가는 상대로부터 보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했다고 해서 내가 기대하는 만큼 보상받을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또한 보상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상대를 원망하거나 비난할 근거가 될 수도 없지요. 나는 나의 방식대로, 상대는 상대의 방식대로 표현하는 겁니다. 상대가 가져야 할 감정과 태도를 미리 정해놓고, 부족하거나 충분하다며 평가하는 건 곤란합니다. 그건 타인의 마음을 내 멋대로 휘두르려는 욕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남을 통제하려는 욕구인 것이죠. 이런 현상을 가까운 사이일수록 허다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받을 보상을 섣불리 확신하곤하니까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마음을 보내면 그에대한 보상이 꼭 있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언제, 얼마나, 어떤 형태로 이뤄져야 하나요? 이 모든 판단은 누가 하고,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사랑은 조건도, 방법도 아닌 이해합니다. 이성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 간의 다양한 형태의 사랑도 포함해서요.이해는 나의 바람과 믿음이 상대와는 다름을 깨닫고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이런 사고의 변화를 바탕으로 타인의 방식을 나의 기준에 욱여넣고 곡해하는 패턴에서 빠져나올 계기를 마련하는 거죠.만약 내가 무언가를 했을 때 타인과 사회가 나에게 반드시 부응해야 한다면, 내가 수긍할 만한 반응이 아닐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괴롭다면, 이는자기애의 과잉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측은함에서 시작된 감정을 하염없이 잇다 보면, 그 끝에 나르시시스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떤 조정없이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발전했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죠. 

 

나의 기대와 상대의 반응이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러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수긍하기 어렵다면 이번엔 다음과 같은 물음을 건네보고 싶네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방도 날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진리일까요. 아니면 나의 믿음일까요? 일상 속에서 나의 믿음과는 다른 결과나 반응을 맞닥뜨릴 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토대로 내 마음을 곰곰 훑어보세요. 그럼 새로운 사실, 즉 측은함에 잠겨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PATH GUIDE 

불안에서 오는 검은 감정 

 

번아웃은 스스로를 돌볼 타이밍을 한참 놓친 후에 찾아옵니다. 수없이 이어졌을 경고를 무시하고 속도제한 없이 내달리다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공중회전을 하며 도로 위에 납작하게 고꾸라진 자가용과 같은 셈입니다. 엉망진창이 된 이때,연민은회복의 필수 요소입니다. 자신을 가엾고 불쌍하게 바라보는 이 정서는 오로지 자기 회복만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지금의 나를 거세게 몰아붙이던 나와, 힘껏 끌어안아주는 나. 둘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나의 기분, 나의 감정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도망치고 있음을 깨달아야겠죠. 그리고 달아나기를 멈춰야겠고요. '회피'에 대해 읽으면서 우리 마음에 자리한 불유쾌한 감정을 찾았다면, 그로부터 고개 돌리던 자기 모습도 볼 수 있을겁니다. '직면'을 다룬 장에서는 회피하는 마음을 좀더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슬픔은 몹시 강렬한 감정입니다. '지금은 슬퍼할 겨를이 없어', '슬퍼할 정도의 일은 아니야' 라며 슬픔의 시기를 정하거나,그 정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금, 여기' 에서의 슬픔을 미래로 유예하죠.

 

이렇게 미뤄둔 슬픔은 강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거나 그 감정이 탄생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다시 드러납니다.마치 썰물이 되어 서서히 풍경이 드러나는 것처럼요. 시간이 지난 만큼 슬픔은 많이 변형되어 있겠죠.어떤 슬픔은 시간의 무게만큼 퇴색되어 사라지겠지만, 어떤 것은 오히려 선명해져 있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거예요. 그렇다면 슬픔은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요. '슬픔을 해소하는 4단계' 가 있습니다. 

 

첫 번째, 슬픔을 느끼고 두번째, 표현하며 세번째, 이해하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해소합니다.

슬픔에 대한 의문을 꾸준히 갖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깁니다. 슬픔이 느껴지는 순간(감정)과안절부절 못하는 모습(행동) 사이에 '내가 슬퍼하고 있구나'(생각) 라는 사실이 반짝, 보일 거예요.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와 감정을 목격하는 그 순간! 그때가 정말 중요해요. 그 순간의 폭이 넓어질수록 슬픔을 충분히 정면으로 마주할 수있거든요. 신기하게도, 슬픔을 흘려보내면 우리 내면의 우울과 괴로움 같은 감정들도 조금씩 해소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매여 있던 힘이 집중할 수 있는 힘으로 치환되죠. 이 순간, 우리는 부정감정으로부터 해방됨 , 즉 '카타르시스'를 느끼는데요. 그래서 슬픔을 '치유감정' 이라고 부르기도 해요.